/ 한국사

벌거벗은 한국사 - 사건편

벌거벗은 한국사 - 사건편

소설책처럼 술술 읽히는 한국사

이 책은 TV 프로그램 <벌거벗은 한국사=""> 를 글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명확하다. 바로 책이 재밌다.

수능 공부때 필수 과목이였던 한국사를 공부할 때는 사실 년도를 외우고, 사건을 암기하는 말 그대로 시험을 위한 한국사였다.

이번에 책을 고르면서 한국사, 특히 사건편을 고른 이유는 한국사를 재밌게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나열되어 진행되는데,

무신정변 -> 여몽전쟁 -> 임진왜란 -> 병자호란 -> 환관 -> 경술국치 -> 조선어학회 -> 광복

의 순서로 진행된다.

역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경술국치 부터 광복 까지, 일제강점기 시대 이야기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부분은 마지막에 얘기하도록 하고 차례대로 흥미로웠던 부분을 적어보려고 한다.

무신정변

무신정변은 말 그대로 무신의 정변인데, 고려는 무신정변을 기점으로 고려 전기, 고려 후기로 나뉠만큼 꽤나 임팩트가 강렬했던 사건이었다.

문신은 오늘 날의 공무원, 법관, 국회의원 등의 역할이었고 무신은 군인, 경찰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문신이 아무래도 국가 정책에 관련된 일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무신에 비해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고 무신을 차별하다가 일어난 일이 무신정변 이었다.

무신이 차별받은, 그리고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된 주요 계기로 무신 정중부와 문신 김돈중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김돈중이 정중부보다 직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무신과 문신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기도 달랐지만 김돈중에게는 아주 든든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인데

바로 김돈중의 아버지가 김부식 이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엮은 인물로 아주 유명하다.

무신은 참고 참다가 결국 무신정변을 일으키고 왕을 유배보내고 그동안 쌓아왔던 분노로 문신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며 권력을 쟁탈한다.

무신정변은 대한민국의 무신들에 대한 대우를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여몽전쟁

팔만대장경의 유래는 무엇일까? 석가모니의 설교, 제자들의 해석, 불교의 계율 등을 기록한 경전이 81,258장이나 되는 팔만대장경은 왜 만들어졌을까?

그때의 몽골은 거의 지금의 미국과 같은 군사력을 지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기마부대를 주축으로 한 몽골의 군사들은 동유럽까지 진출해서 대제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고려는 위에서 말한 무신정변 이후, 최씨 집안이 권력을 꽉 잡고 있었는데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하지 혼란한 정세를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모종의 사건으로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는데 지배층은 몽골을 그냥 오랑캐 즈음으로 취급할 뿐 사치나 부리면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몽골은 순식간에 고려의 지역을 하나하나씩 박살냈는데, 고려가 늘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귀주성의 강감찬 장군, 은 아니고 같은 귀주성에서 박서 라는 장군과 귀주성의 백성들이 몽골의 진군에 발목을 잡기도 하고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고려 승려 김윤후 가 화살 한 방으로 몽골의 총사령관 살리타를 죽이는 사건도 있었다. 이 외에도 고려의 수 많은 백성들이 투쟁하여 몽골을 당황케했다.

하지만 결국 고려의 조정은 몽골에게 항복한다. 수 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이 죽어나가면서 지키려했지만 조정은 쉽게 놓아버렸다.

어느 책에서도 죽어나간 백성들이 이름은 적혀있지 않고 몽골에 항복한 최씨 가문의 이름만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

임진왜란하면 이름 석 자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번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이 시기동안 우리가 빼앗긴 문화 에 관한 얘기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나서 조선의 도자기, 바느질, 세공 기술자들을 모두 납치했고 평범한 조선인들은 노예로 팔았다.

심지어 서책도 훔쳐서 가져가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일본의 문화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조선의 기술자를 훔쳐간 덕택이었다.

일본에 끌려간 기술자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평생을 일본에서 살며 자신의 기술로 도자기를 만들고, 바느질을, 세공을 하며 살아야만 했다.

누군가는 그나마 대접이라도 받으며, 누군가는 대접도 받지 못하며 남의 나라를 위한 일을 했다.

병자호란

조선의 왕, 인조가 땅에 대고 세 번 큰절을 하는 삼전도의 굴욕은 공부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그리고 분명 공부하면서 이를 기록한 비석인 삼전도비 가 어디 있는지도

들었던 것 같았는데 삼전도비가 어디에 있는지는 시험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외우지 못했다. 근데 알고보니 내가 자주가는 석촌호수 에 있다. 공부하면서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 책을 읽으면서는 석촌호수에 꼭 한 번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이긴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 비록 모진 생활을 겪으면서도 장사에 수완을 발휘하는 등,

여러 위기를 잘 겪어왔지만 자신의 왕위를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소현세자를 내쳐버린, 소현세자 아버지 인조에 결국 삶의 의지가 꺾인다.

환관

환관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의 의미가 좀 다르다. 고려 시대에는 환관과 내시가 구별되었는데 조선 시대때는 환관과 내시는 같은 말이었다. 환관은 왕실 사람들 옆에서 마치 비서처럼 일을 했었다. 우리는 보통 내시를 생각하면 별거 아닌 것 처럼 생각하지만 환관은 왕의 최측근이다보니 자연스럽게 권력을 쥘 수 있는 직책이었다.

왕의 말을 전하는 것 부터, 왕의 음식을 담당하기도 하고 술, 다과, 약에 대해 담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환관은 신분에 제한이 없었으므로 신분 상승을 노리던 모든 사람들이 노리는 직책이었던 것이다.

경술국치

역시 제일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경술국치부터 시작해서 광복까지이다. 을사오적중에 하나인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였을까? 이완용은 고종에게 있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재 그 자체였다. 심지어 고종이 미국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설립한 영어 학교, 육영공원에서도 이완용은 뛰어난 재능을 보였교 그렇게 주미 조선공사관의 관원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조선은 아직도 청나라의 간섭 아래에 있었는데 고종은 청나라로부터 벗어나 미국과의 친목 도모를 꾀했다.

이완용은 이렇게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고종의 최측근이 되었고 주미 조선공사관으로 일하며 친미 성향에 더욱 가까웠을 것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없던 조선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아는 이완용은 친미파의 대표 인물이였으며, 대미 외교의 1인자였다. 심지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조차도 이완용과 함께 도모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완용은 순식간에 일본 앞잡이로 돌변한 것일까?

이완용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과정은 전부 개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고종, 미국, 일본, 러시아 모든 것이 그저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쯤으로 여겼나보다. 나랏돈을 횡령한 혐의가 있었다고도 하니 애국심은 분명 없었을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은근히 일본을 지지해주는 것 같은 미국, 이런 상황 속에서 이완용은 자신의 다음 출세길을 찾아 친일파가 된 것이었다.

조선의 대신들을 중명전에 무력으로 몰아놓고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토 히로부미는 8명의 대신에게 을사늑약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여기서 참정대신 한규설민영기 는 절대 반대를 외쳤다. 이 중에서 한규설은 끝까지 조약 체결에 반대했고 민영기는 이후 친일파가 되었다. 이완용보다 더 기억되어야 할 인물은 한규설이 아닐까 싶다. 이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에 찬성을 외친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을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경술국치는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라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아주 치욕적인 조약인, 한일강제병합조약을 이완용이 ‘먼저’ 일본에게 제시했고 이 조약이 경술년에 조인되었다.

이완용은 몇 번의 암살시도를 당했지만 결국 자연사했다고 한다. 죽으면서 마치 조선을 신세대로 개척했다고, 자기가 사람들을 계몽한 것처럼 느끼면서 죽었을까?

조선어학회

이렇게 일제강점기시대가 쭉 이어지며 일본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죽이려고 했다. 특히 한글은 우리나라 정체성이었고 일본은 재빠르게 국어를 한글에서 일본어로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는 한글이 없어지는걸 두고 보지 않았다. 사실 한글은 누군가가 이름 붙여주기 전까지는 한글이라는 이름이 없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한글이라 불린게 아니라 말 그대로 글자를 만들었던 것이었다. 한글에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바로 국어학자 주시경 이다.

주시경은 한글을 연구하기 위해 국어연구학회 를 설립했고 국어연구학회는 추후에 배달말글몯음 -> 한글모 등으로 바뀌었다. 주시경은 일생의 소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사전 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주시경은 경술국치 이듬 해인 1911년에 제자들과 함께 말모이 라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 편찬을 계획하게 된다. 하지만 주시경은 마음 먹은지 4년 만에, 39세의 나이로 돌연 사망해버린다. 하지만 유학파 이극로가 주시경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한글모’ 라는 단체를 재건한 조선어연구회 라는 단체를 만들고 다시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한다.

조선어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투리들이 있었는데 고작 몇 명의 사람들이 이 사투리를 전부 알아내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선어연구회는 학교 선생님들이 많았던 점을 이용해서 방학 숙제로 학생들에게 방언을 기록해오라는 숙제를 주고 이를 활용해 사전을 편찬한다. 정말 엄청난 아이디어 같다. 하지만 끝내 일본이 조선어연구회를 독립운동가들과 엮어서 저물어가는듯 했는데..

광복

조선어학회는 일본의 판결에 재심을 신청했는데 일본은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시간을 끌며 버티다가 결국 1심 판결대로 형량을 확정해버린다. 그런데 재심 판결의 날짜가 1945년 8월 13일이었다. 2일 후,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게 되고 조선어학회는 기존의 작업물을 다시 가져와 결국 사전을 편찬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광복을 맞은 8월 15일,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엄청난 환호성을 내지르고 사람들의 축제 분위기였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패전국 일본의 방송을 사람들이 알아듣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인 8월 16일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광복을 맞이했다는걸 알게 되고 이제서야 비로소 광복의 날을 맞은 것이다.

조선 내부에서 조선을 달달 볶던 조선총독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일본으로의 무사 귀환을 위한 해결책을 찾는다. 그들이 택한건 바로 독립운동가와 손 잡는것 이라는 평범하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러운 해방으로 어지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직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무고하게 투옥된 조선인 석방을 비롯한 여러가지 조건으로 조선총독부의 무사 귀환을 약속했다. 하지만 조선에 있는 일본 헌병은 광복 이후에도 조선을 괴롭혔는데, 조선이 공산주의로 넘어갈 것 같다는 헛소문을 미국에 전달해버렸다. 미국은 이를 듣고 조선이 공산당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들이 도착할 때 까지 조선을 일본에게 맡겨버린다. 일본은 그렇게 아주 평온하게 자신들의 고국으로 무사 귀환했다.

8월 15일 광복으로부터 일본이 무사 귀환할 때까지도 사람들은 억압받고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다.

총평

이 책은 내 기준에서는 흔히 알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흔히 알려진 사람이 아니고 이름 없이 묻힌 사람들의 이야기도 자주 나온다.

내가 잘 알려진 우리나라의 역사 조차도 잘 아는건 아니지만, 어느 역사든 먼저 배워야하고 먼저 알아야하는게 있는걸까?

이렇게 그냥 흥미롭게 읽는게 사실 맞는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이 상당히 재밌게 느껴졌다.

한국사를 처음 입문한다고 했을 때 오히려 이 책을 추천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